내가 좋아하는 시와 글

사평역에서 곽재구

한주환 2018. 4. 6. 19:36




막 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 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릅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 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주었다 




사평역은 남한에 없는 상상속의 역이름이다. 찾질 말도록.. 
몇년전 눈꽃열차를 타고 갔던 승부역이 이 역과 쬐끔 비슷하더구만.. 
이 시는 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발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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