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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사 마누라로 살기

한주환 2018. 4. 2. 04:53


전남 담양군 대덕면 성곡리 축산분뇨처리시설을 백지화한 이들은 70,80대 할머니 농성단이었다.

이들은 10개월 동안 “우리가 뽑은 군수가 우리를 무시한다”며 농성을 벌였다.




이 농성의 불씨를 이어간 이는 13년 전 마을로 이주한 주민 김희택씨였다.  김씨는 80~90년대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의장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 사무처장, 전국민주민주운동연합(전민련) 대변인 등을 지낸 사회 운동가였다. 유신 독재에 반대하고 민족 통일을 추진하다 78년, 86년, 91년에 세 차례 구속된 전력이 있었다. 그가 초야에 묻혀 살다 생활 운동에 뛰어든 모습을 부인인 조명자씨가 페이스북에 올렸다. 내용을 간추렸다.





나는 자칭 지사 마누라다.

그것도 요즘 잘 나가는 도지사의 ‘지사’ 말고 위인전에 나오는 애국 지사의 그 ‘지사’말이다. 이런 황당한 명칭이 붙게 된 연유를 설명하자면 신당동 떡볶이 건물 2층부터 시작해야 한다. 결혼하고 연년생으로 아이를 낳았는데 둘째 아이 돌도 되기 전에 남편이 민청련 사건으로 구속이 되고 말았다. 기저귀 차는 아이 둘에 남편 옥 바라지 게다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삼 중고가 한꺼번에 닥치고 만 것이다. 산후 조리도 제대로 못하고 큰 아이는 친정 엄마에게, 갓난이 둘째는 동생에게 떠맡기고 나는 처녀 때 근무했던 출판사로 다시 복귀하게 되었다. 상황이 이러니 몸뚱이 하나로 아이 부양, 남편 옥 바라지, 출판사 업무 모두 제대로 해낼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엄마, 동생에게 떠맡기고 근무 짬짬이 면회 다니고. 사실 출판사 사장인 영희 언니가 덮어주지 않았다면 불성실 근무로 잘려도 열 번은 넘게 잘렸을 것이다. 아무튼 이때 그 신당동 떡볶이 상가 2층을 방문하게 됐다. 절친하게 지냈던 남편 선배의 부인이 신당동으로 나를 끌고 간 것은 아주 잘 본다고 소문난 명리학 선생을 알현시키고 싶어서였다. 감옥에 갇힌 후배, 기저귀 차는 어린 새끼 키우며 먹고 사느라 발동동 구르는 아내. 우리 부부의 고난이 너무 안타까워 언제나 그 고난이 끝날까 역술가에게서라도 신통한 답을 들려주고 싶었던 것이다. 얼떨결에 끌려간 그곳에서 남편 사주와 내 사주를 이리저리 살피던 선생, 침묵 끝에 첫 일성이 “이 사람 뭐 하는 사람이에요?”였다. 순간 당황한 나는 “출판사에 다니고 있는데요” 얼렁뚱땅 갖다 붙였는데 남편 사주 풀이가 어찌나 가관이던지 30년 전의 그 풀이를 어제 들은 것처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 사람은 지사 사주예요. 옛날에 그 독립군 있잖아요? 그런 팔자를 가진 사람이니 처 자식 고생은 말할 것도 없지. 이런 사람한테 뭘 기대하나? 먹고 사는 것은 아주머니가 할 수밖에 없겠는데…허.”




오나가나 귀 얇은 데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나. 그 자리에서 마음을 비웠다. 내가 사주쟁이라도 그렇게 말하겠다. 세상에 옳고 그름이 칼날 같고 원칙과 명분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 빡빡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는 그 성격에 무슨 정치. 민주화와 통일을 외치며 길거리에서 사는 게 딱 맞는 일이다. 자, 이제는 남편한테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먹고 사는 것은 내가 책임지리라.

잘 보기로 소문난 명리학자의 호언을 증명이라도 하듯 남편은 91년 민간이 주도하는 남북한 통일회담을 추진했다는 이유로 결혼 후 두 번째 감옥을 가게 됐다. 수배와 구류를 밥 먹듯 해도, 두 번의 옥바라지가 아무리 고달파도 힘들다고 짜증내고 징징거리지 않았던 것은 그 시대에 그런 저항운동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해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산전 수전 공중전을 겪고 이제는 이름 없는 촌로가 되어 늙은 마누라와 코 맞대고 그 날이 그날인 말년을 향유하는 왕년의 그 ‘지사’가 다시 거리에 나섰다. 민주화와 민족 통일 그런 거대 담론의 실천이 아닌 산골 마을 40여 가구에게 가해진 부당한 공권력, 즉 담양 군수의 막무가내 행정에 대한 저항으로 말이다. 사실 담양 군수가 축산분뇨 처리장 시설 부지로 우리 마을을 낙점했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나는 이 마을을 떠나려고 했다. 대규모 분뇨 처리장 설치는 해당 지역 주민들 의견 청취가 일일번인데 그것을 생략할 정도라면 우리 마을을 얼마나 만만하게 봤겠는가. 군수 생각처럼 나도 마을 주민들 성향을 보건데 분뇨처리장 설치를 막는 싸움은 절대 할 수 없을 것이라 일찌감치 포기를 했다.




이 마을에 이사 온 지가 13년이 되었는데 처음부터 마을 어른들이 젊은 것들한테 어른 대접을 못 받는 것이 너무 이상했다.

십여년 장기 집권 했다는 이장이 대충 술 취한 목소리로 오만 방자하게 어른들을 훈계하고 윽박 질러도, 젊은 아낙들이 할머니·할아버지한테 대충 반말 짓거리로 틱틱거려도 그 앞에서 호되게 나무라는 꼴을 못 봤다. 마을 주민들이 유순해 텃세가 없는 것은 다행스럽지만 위아래가 없는 마을은 주민 간의 규범과 질서가 그만큼 없다는 뜻이다. 때문에 농기구를 부리고 자기 차로 면이나 군을 들락거리는 젊은이들이 큰소리 치고 마을을 휘젓고 다녔다. 군수는 이런 마을 환경을 교활하게 이용했다. 사전에 이장과 몇몇 젊은이들을 회유했겠다, 일사천리로 밀어붙여도 탈이 없을 것이라고 확신했던 것이다. 원주민이 이런데 외지에서 들어 온 사람이 무슨 힘을 쓰겠는가.





그런데 이변이 일어났다. 군수에게 대놓고 모욕을 당한 마을 어른들이 분개한 것이다. 당신들 스스로 군청 앞에서 농성을 하자고 결의를 했다. 그야말로 얼떨결에 대책위에 합류하게 되었다. 농성 준비를 책임질 사람이라 봤자 마을 원주민인 부녀 회장 부부, 얼마 전에 명퇴한 중학교 선생님, 그리고 나다. 대중 집회를 주도해 본 경험이 한 번도 없는 사람들이다 보니 그야말로 어디서 무엇부터 해야 할 지 막막하기 짝이 없었다. 우선 경찰서에 가서 집회 신고부터 하고 현수막과 피켓 서너 개를 준비했다. 하루 종일 길바닥에 앉아 구호를 외칠 수도 없고, 생각 끝에 계란 장사 스피커처럼 반복해서 외치는 테이프를 녹음하기로 했다.

“우리는 담양군 성곡리 마을 주민들입니다”로 시작되는 3분짜리 녹음에 무슨 일로 왜 우리가 길거리로 나왔는지, 군수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무엇이 부당한지 조목조목 열거했다. 아나운서는 우리 마을에서 제일 목소리가 낭랑한 중학교 선생님 부인이 맡았다. 처음으로 출정하는 날 마을 일은 마누라한테 일임하고 이제껏 나서지 않던 남편이 출근도 미루고 따라 나서는 것이었다.




“당신도 가려고?”

“그럼 가봐야지. 마을 어른들이 모두 싸우기로 하셨는데.”

저쪽으로 넘어간 젊은 축들 빼고 여자 분들은 89세 자춘댁, 장화댁, 88세 지산댁, 87세 백동댁, 강희댁, 84세 행정댁, 82세 갑동댁, 80세 정동댁, 광주댁, 성춘댁, 오산댁…. 아무튼 80대 할머니들이 십여분, 70대 십여분, 나머지 젊은 축이 50~60대 대여섯명이었고, 남자 분들은 70~80대 어른 6명을 포함한 10분이 전부였으니까 다 합해봐야 35명 남짓이었다.

군청 앞에 천막을 쳐 놓고 일단 앉았는데 테이프 틀어 놓는 것 외에 계획된 순서가 없었다. 엉거주춤 앉아 뻘쭘한 표정으로 서로의 눈치를 살피고 있는데 남편이 작은 목소리로 집회 시작 선언을 누가 하기로 했냐고 물었다.

“그런 거 정하지 않았는데…” 했더니 한심한 표정으로 집회를 하려면 진행순서가 있어야지 무대책으로 앉아 있으면 어떡하냐고 나를 야단쳤다. 참말로, 언제 내가 집회를 해봤어야 알지? 현수막, 피켓 구호 정하고 만드는데도 코피 터졌고만. 은근히 부아가 났다. 그럼 농성이 전공인 당신이 하면 되지 않느냐고 쏘아붙였더니 남편이 한쪽으로 대책  위원장과 위원들을 불러 모아 즉석 회의를 주재했다. 사회는 남편이 보고 집회 시작과 종례 인사는 대책 위원장이, 그날 그날의 상황 보고는 총무인 명퇴한 과학 선생이 맡는다. 그리고 담양군과 군민들에게 알리는 연설은 하루 두 번 남편이 맡아 하겠다. 마을 사람들은 3분 짜리 녹음 말미에 나오는 구호를 다 같이 외친다. 이렇게 해서 작년 7월 20일부터 남편은 군청 앞 농성에서 가장 중요한 일원이 되었다. 백수인 선배를 걱정해 소소한 생활비라도 지원해주려고 자기 사무실에 출근하라고 배려해준 후배의 성의도 마다하고 남편은 다시 백수가 되었고 거리의 투사로 돌아갔다.





남편의 전력을 모르는 마을 어른들은 핵심을 콕콕 찌르는 남편의 연설을 듣고 어쩌면 저렇게 우리 속을 시원하게 뚫어주는 연설을 하느냐고 감탄을 하신다. 남편의 연설을 들으면 군수가 무엇을 잘못하고 법을 어떻게 어겼는지, 우리가 얼마나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는지 금방 알겠단다. 몇 달 내내 반복적으로 학습한 덕분에 우리 마을 어르신들 대부분은 불시에 마이크를 들이대도 우리들 요구의 정당성과 군수의 부당함을 논리적으로 설파할 수 있게 되었다.

찌는 듯한 염천 더위에 시작한 싸움이 살을 에는 칼바람에도 끝날 줄을 모른다. 우리 부부를 아는 지인들은 얼마나 고생이 많겠냐고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다. 그런데 웬걸. 주 5일 아침 9시에 출근해 오후 4시에 끝나는 농성을 시작하고 남편의 얼굴이 더 좋아졌다.





물 만난 고기처럼 얼굴과 눈빛이 활기로 환하게 빛나는 것을 보면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정신은 예나 지금이나 전혀 녹슬지 않았나 보다. 처자식은 굶든 말든 오로지 민주주의와 평등, 인권을 위해 자신을 온전히 바친다는 지사(志士). 내 남편의 사주 팔자가 지사 사주 팔자라면 이 정도 사는 게 얼마나 행운이랴. 집이 없어 길거리에 나앉기를 했나, 끼니가 없어 굶기를 했나.


빈한하지만 사람 대접 받고, 한 눈 안 팔고 제대로 살고 있다고 칭찬도 받고, 늘 웃고 산다고 사랑도 받고…. 이만하면 된 거 아닌가? 신당동 떡볶이 상가 2층, 사주 선생을 다시 만난다면, 너무 걱정 마시라고, 나름대로 굶지 않고 잘 살았다고 근황을 전하고 싶다.




원문보기: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747339.html?_fr=mt2#csidx66a3c386c25ca5db095f41461e0b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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