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시와 글 170

전고 꽃밭에서

坐中花園 꽃밭에 앉아서 膽彼夭葉 꽃잎을 보네 兮 兮 고운 빛은 云何來矣 어디에서 왔을까 灼灼其花 아름다운 꽃이여 何彼 矣 그리도 농염한지 斯于吉日 이렇게 좋은 날에 吉日于斯 이렇게 좋은 날에 君子之來 그 님이 오신다면 云何之樂 얼마나 좋을까 臥彼東山 동산에 누워 望其天 하늘을 보네 明兮靑兮 청명한 빛은 云何來矣 어디에서 왔을까 維靑盈昊 푸른 하늘이여 何彼藍矣 풀어놓은 쪽빛이네 吉日于斯 이렇게 좋은 날에 吉日于斯 이렇게 좋은 날에 美人之歸 그 님이 오신다면 云何之喜 얼마나 좋을까 세종 때 인물인 최한경의 (泮中日記)에 나오는 "화원"(花園)이란 제목의 漢詩에 나오는 것입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마음 속 깊이 간직했던 박소저 라는 여인을 그리며 지었다는 詩인데 참 노랫말이 아름답습니다. "이렇게 좋은 날..

독작 류근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믿는 사람은 진실로 사랑한 사람이 아니다 헤어질 때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는 사람은 진실로 작별과 작별한 사람이 아니다 진실로 사랑한 사람과 작별할 때에는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말라고 이승과 내생을 다 깨워서 불러도 돌아보지 않을 사랑을 살아가라고 눈 감고 독하게 버림받는 것이다 단숨에 결별을 이룩해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아 다시는 내 목숨 안에 돌아오지 말아라 혼자 피는 꽃이 온 나무를 다 불 지르고 운다 3번 이별한 사람이 있다. 2번째 돌아오면서 평생 안 볼려고 했다고 하더니만, 또 떠났다. 나이 먹으면 그런 대우를 당연히 받는다고 감수했다.

結초보恩 방윤후

신호등 빨간불 맞춰 차들이 횡단보도 흰 선 뒤에 멈춰 있다 結초보恩, 이 은혜는 꼭 나중에 다른 초보 분께 갚도록 하겠습니다 자동차 뒤창에 붙어 있는 글귀가 선명하다 모든 초보에게 은혜가 있다니 입가 미소에 농도가 짙어진다 어쩌면 가로수는 구름에게 빚지고 구름은 태양에게 빚졌던 걸까 횡단보도 안전하게 건넌다는 것은 누군가에게 은혜를 갚는 일일 수도 있겠다, 생각해 보는 사이 아버지는 생전에 내게 묻곤 했다 키워 주고 가르쳐 주니 나한데 빚진 것 언제 갚을래? 커서 다 갚을 게요, 양손을 크게 벌린 어린 딸을 흐뭇하게 내다보듯, 이제 막 출발할 저 차에게도 순순한 길이 이어질까 도시에 빌딩들은 길을 헤아려 조금씩 비껴서고 고층에 가린 그늘에도 햇살이 머물다 갈 사랑이 있을 것이다 초보로서 책임을 다하면 진..

고니 최두석

호수 위에 고요하게 떠서 곧잘 우아한 선율의 주인공이 되어온 고니 하지만 수면 밑 물갈퀴 발은 쉴 새 없다고 한다 그래야 평화롭게 떠 있을 수 있다고 한다 마치 아름다운 곡조를 내기 위해 무대 뒤에서 끊임없이 활을 켜야 하는 예인처럼 고니는 늘 혼탁한 목청으로 울지만 죽음을 눈앞에 둔 순간의 마지막 울음은 구름 너머로 청아하게 울려 퍼진다고 한다 그리하여 배우의 고별무대를 화가의 최후의 그림을 고니의 노래라 칭한다고 한다 청아한 마지막 울음이 맘에 든다.

살아서 돌아온 자 박노해

진실은 사과나무와 같아 진실이 무르익는 시간이 있다 눈보라와 불볕과 폭풍우를 다 뚫고 나온 강인한 진실만이 향기로운 사과알로 붉게 빛나니 그러니 다 맞아라 눈을 뜨고 견뎌내라 고독하게 강인해라 거짓은 유통기한이 있다 음해와 비난은 한 철이다 절정에 달한 악은 실체를 드러낸다 그대 아는가 세상의 모든 거짓과 악이 총동원되었어도 끝까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자는 그 존재만으로 저들의 공포인 것을 진실은 사과나무와 같아 진실한 사람의 상처 난 걸음마다 붉은 사과알이 향기롭게 익어오느니 자, 이제 진실의 시간이다 사노맹 동지였던 조국을 위해 쓴 시 같다. 모처럼 예전 박노해다운 시가 나왔다.

4월이 오면 권영상

4월이 오면 마른 들판을 파랗게 색칠하는 보리처럼 나도 좀 달라져야지 솜사탕처럼 벙그는 살구꽃같이 나도 좀 꿈에 젖어 부풀어 봐야지 봄비 내린 뒷날 개울을 마구 달리는 힘찬 개울물처럼 나도 좀 앞을 향해 달려 봐야지 오, 4월이 오면 좀 산뜻해져야지 참나무 가지에 새로 돋는 속잎같이 코로나가 지겨운 지금, 이러고 싶어요

박노해 수필

진평왕릉은 내 ‘사람’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화려해야 눈에 들어오고, 장식이 많고 특출한 형상을 해야만 대단한 것으로 우러르는 이 시대의 천박한 안목으로는 진평왕릉의 격조가 잡히지 않습니다. 안으로는 왕릉의 위용과 기품을 잃지 않으면서도 소담하고 온화하고 유순한 사람의 인품이 우러 나오는듯한 정서가 있는 왕릉. 그것은 한때의 적이었던 백제문화의 감화를 자기 것으로 키워낸, 열려있는 사람의 따뜻한 가슴 같은 것입니다. 허허롭게 트여 있는 개심사와 무위사 극락전의 단아하고 한적한 기품과 함께 진평왕릉은 항시 나에게 ‘열려 있으라, 열려 있으라’ 나직한 목소리로 나를 돌아보게 합니다. 에밀레종은 뼈아픈 내 침묵, 절필 이후에 새롭게 시작할 나의 시가 어떤 울림을 지녀야 하는지를 깨우쳐줍니다. 장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