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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겁해지기로 결심하다

한주환 2018. 3. 18. 22:48


K의 시위 이후 언니는 부쩍 사람들을 많이 만나기 시작했다.

한신대 대학원생들과 고대생은 물론이고 다른 학교 학생들도 우리 수유리 자취방을 찾았다.

그중에는 학내에서 데모를 한 뒤 ‘도바리’(도피를 가르키는 은어)중인 이들도 있었다.

그들 중에는 마땅히 몸을 숨길 곳을 찾지 못해 우리 집에 하루, 이틀 묵어가는 경우도 있었다.





그럴 때면 손님은 하나 뿐인 침대에서, 영초 언니와 나는 바닥에서 자곤 했다. 늘 긴장과 초조감으로 터져나갈 것 같은 나날이 이어졌다. 그러는 한편, 언니는 본격적으로 추위가 다가오기 전에 감옥에 있는 고대 선후배들에게 내복을 전달해야 한다면서 다시 한번 모금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돈을 모으고, 그 돈으로 내복을 사고, 구입한 내복과 영치금을 형편이 가장 어려운 순으로 가족들을 만나서 전달하고.....그 번거롭고 수고로운 일을 언니는 지독한 꼼꼼함과 정성으로 해냈다. 이름을 워낙 여러번 기록했기 때문일까. 지금도 나는 그 이름들을 죄다 떠올릴 수 있다. 





겨울이 깊어갈수록 마음의 들판에는 더 싸늘한 바람이 불었다.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본격적인 데이트를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K를 떠나보낸 상실감은 각오했던 것보다도 더 컸다.

38번 시내버스를 타고 야학에 가면서 차창 밖으로 청춘 남녀들이 추운 날씨를 핑계 삼아 어깨를 두르거나 팔짱을 끼고 다니는 모습을 보노라면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당신들은 좋겠다. 함께 있을 수 있으니까.’ 마음 놓고 사랑할 수 있는 그네들이 부러운 나머지 질투와 적의마저 느꼈다. K가 보고 싶어 손톱이 아려 왔고, 목뼈 근처가 콕콕 쑤시듯 아팠다(이상하게도 누군가 보고 싶으면 이런 증세가 찾아 든다). 한번은 길을 가다가 제 풀에 털썩 주저앉은 적도 있었다. 마음의 통증을 견딜 수가 없어서. 




긴급 조치 사범은 미결수일지라도 직계 가족 외에는 면회도, 편지도 허락되지 않았다. K는 여동생의 이름으로 자기 집으로 내게 편지를 보냈다. 난 그의 집에 찾아가서 ‘여동생에게 온 편지’ 를 찾아야만 했고, 여동생이 되어서 구치소로 비둘기를 날렸다. 간수가 수인들의 편지를 검열하기 때문에 내용도 가족 관계를 감안해서 써야 했지만, 우리끼리만 알아들을 수 있는 사랑의 표현을 사이사이에 슬쩍 끼워 넣곤 했다. 그가 보낸 봉함 엽서 사연 속에서 그런 암호를 찾아냈을 때의 기쁨이란!  풍요로움만이 아니라 빈곤도 사랑을 키워나가는 또 다른 방식이었다. 



콩나물을 건지느라 퉁퉁 불은 엄마의 손을 보면서 

겨울방학을 맞아 수유리 자취방을 떠나 제주도로 내려갔다. 몇 가지 소소한 사건이 벌어졌다. 그중 하나는 우리 과의 지도 교수님이 ‘현장 지도차’ 내 고향 집을 방문한 일이었다. 문제 학생 관리 차원에서였다. 내가 대학 신문사에 다니느라 방학 때도 늦게 귀향해서 빨리 상경하는 줄 알고 있던 부모님은 내가 서울에서 ‘높으신 교수님’이 직접 내려올 정도로 ‘말썽 꾸러기’로 찍혀 있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알았다. 집안이 발칵 뒤집혔음은 물론이다. 당시 서울에서도 비슷한 분위기였지만, 특히 ‘정치적 변방’인 제주에서는 ‘데모하는 대학생은 빨갱이’ ‘데모 한번 잘못 했다가는 집안이 다 망한다’ ‘호적에 빨간 줄이 죽 그어진다’는 인식이 지배적이었다. 시장통에서 식료품 가게를 하는 우리 부모의 의식 수준도 거기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다.

 


서울의 명문대학에 딸을 유학 보냈다는 자부심으로 충만했던 우리 부모에게 나는 엄청난 ‘배신’을 때린 셈이었다. 엄마는 눈물바람이었고, 이북 출신인 아버지는 한숨바람이었다. 그러나 부모의 눈물과 한숨보다는 모진 고문을 당한 끝에 추운 감옥에서 겨울을 나고 있는 혜자언니와 K의 고초가 더 마음아팠다. 부모님과 나 사이에는 팽팽한 한랭전선이 형성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엄마가 일하는 가게에 갔다가 엄마가 대형 고무 다라이에서 콩나물을 건져내는 광경을 목도했다. 가만히 있어도 손이 곱아터질 듯한 추위에(흔히 서귀포는 무척 따뜻할 거라고 착각들을 하는데 바닷바람 때문에 장난 아니게 추울 때도 많다) 엄마의 손은 그 많은 양의 콩나물을 건져내느라 퉁퉁 불었고, 푸르딩딩하게 변색되어 있었다.




쇳덩이에 세게 맞은 듯 머리가 띵했다. 내가 야학을 하면서 그토록 가슴 아파하고 동조했던 노동자의 삶보다 더 나을 것도 없는 엄마의 삶이었다. 이런 고생을 하면서도 딸이 대학을 졸업해서 당신과는 달리 좋은 직업을 갖게 되리라는 희망으로 버티는 그네에게 또 다른 고통을 줄 만한 ‘용기’가, 그처럼 강철 같은 ‘신념’이 내게는 없었다. 더군다나 내밑의 남동생이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과 어울려 말썽을 피우는 바람에 엄마의 애간장은 녹아내리고 있는 판국이었다. 거기에 나까지 문제를 일으킨다면..... 

나는 이를 악물고 ‘비겁’해지기로 결심했다. 계속 운동을 할 용기가 없다면 확실하게 비겁해져야만 했다. 


게다가 야학을 일년 넘게 하는 동안 내게는 화장실에 가지 못하는 증세가 생겼다. 열악한 화장실 구조 때문에 오랜 시간 억지로 참다 보니 아예 오줌을 제대로 누지 못하는 증세로 악화되고 만 것이었다. 신장 기능이 망가졌는지 온몸이 퉁퉁 부어올랐다. 아침에는 눈두덩이가 소복하게 부풀어 오르고 주먹을 제대로 쥘 수 없을 지경이었다. 악화된 건강을 핑계 삼아 야학을 그만 두고, 영초 언니네 자취방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겨울방학 끝머리에 서울로 올라와서 영초 언니에게 학교 근처에서 친구와 자취하겠다고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언니는 무척 서운해 하면서도 그러라고 했다. 언니 곁에 있는 걸 부담스러워한다는 걸 짐작하는 듯했다. 언니는 서글픈 미소를 지으며 이렇게 말했다. 
“다들 감옥에 가야만 하는 건 아니지. 넌 글을 잘 쓰니까 글 쓰는 일로 이 시대에 기여할 수 있을 거야.” 





77년, 78년 군대 가기전 내 생활과 유사했던 글이다. 난 경찰에 달리지 않았고, 글쓴 서선배는 엮였고..왜 30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긴장감이 느껴지나 모르겠다. 안달린 죄책감인가? 한나라당이 큰소리치는 한국에도 안 살고, 캐나다와서 사는데도? 아직도 죄책감? 한국 짭새 본지도 4년이 되가는 구만.. 아직도 가심이 저리다. 우린 참 어려운 20대를 살아냈었다. 


글쓴이는 서명숙이라고 시사저널 편집장, 올레대장이고 K는 남편입니다. 명문 대학은 고려대학교,

제주도 가게 이름은 명숙상회입니다. 결국 서명숙씨도 체포됩니다. 

영초 언니는 천영초씨라고 현재 터론토에서 교통사고로 고생? 하고 계시다고만 쓸랍니다.

신은 공평하지 않다고 생각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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