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쓴 글

여자의 일생 페데라프

한주환 2018. 3. 8. 18:16




아줌마 G는 호상好喪치른 여자다.

세상이 변해서 이제는 칠십이 호상이 아니다. 예순은 청춘이요, 아흔이 넘어야 호상 축에나 든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아줌마 G가 호상 치렀다는 데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다.

아줌마 G의 시어머니는 100살을 채우고 나서야 비로소 세상을 뜬 것이다. 


겨우 만 스무살 되던 해 교대를 졸업하고, 아줌마는 아저씨 G와 결혼했다.
아줌마 G는 교사 자격증 딸 때까지 손에 물을 묻혀본 적이 없었다.
여자는 음식 솜씨 좋아봤자 밥할 일 밖에 없으니, 그 시간에 소설책이나 읽으라는 친정 어머니의 덕이었다. 




일곱 살이나 나이 많아 세상 물정 잘 아는 아저씨 G와 결혼한 게 아줌마 G의 계산 착오였다.
아저씨 G는 시골에서는 드물게 일류 대를 나왔고, 세상 돌아가는 일들을 많이 말해줬다. 
아저씨 G는 외국에는 이런 문물이 있으며 한국 정치는 이렇게 돌아 간단다, 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시골 P읍에서 싸르트르, 고호에 대해 대화가 통하는 남자는 아저씨 G밖에 없었다.
세상 물정을 이렇게 잘 아는 아저씨 G의 미래는 창창해보였다. 
아줌마 G의 눈에 아저씨는 연애 소설의 남자 주인공과 좀 비슷하게 보였다. 

아줌마 G가 몰랐던 건 입맛 까다로운 시부모가 있으면, 고호에 대해 대화를 나눌 시간은 전혀 없다는 것이었다.
하루 종일 밥을 차리고 설겆이를 치워야 했다. 시아버지는 입이 지극히 높아서, 여러가지 맛을 조금씩 상큼하게 보여줘야 했다.
시아버지는 배가 부르는 것을 싫어했다. 그만큼 맛을 다양하게 못 보니 아깝다는 것이었다.
이 밥 한 술을 먹으면 그만큼 배가 부를 터인데, 그러면 그만큼 맛을 느낄 기회가 없어진다는 게 시아버지의 지론이었다.



시아버지는 밥의 첫 술을 반드시 시원한 물김치와 같이 들었다. 
밥의 둘째 술은 뜨거운 국맛을 가늠하는 데 쓰는 것이었다.
셋째 술은 나물이 얼마나 본때 있게 무쳐 졌는가를 보고,
넷째 술은 고기와 같이 입안에서 음미했다.

시아버지의 반상기는 특별히 은에다 칠보를 넣어 맞춘 것이었다. 각각의 반찬 그릇은 꼭 한 두 번 젓갈 질 한만큼 작았다. 
그러지 않으면 열 두가지 반찬을 고루 고루 맛볼 수 없기 때문이다. 은 숟가락이 충분히 반짝거리지 않아도 시아버지는 밥상을 뒤엎었다. 보이는 은 숟가락 하나 깨끗이 관리 못하면, 안 보이는 밥 속에는 도대체 무엇을 섞었겠느냐는 게 시아버지의 말이었다.



아줌마 G의 시어머니는 시아버지만큼 다채로운 밥상을 원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시어머니는 정시에 밥을 먹기를 원했다. 아침 일곱시, 낮 열두시, 밤 여섯시 정각에 밥을 먹는 것이 시어머니의 건강 비법이었다. 밥을 먹고 나면 시어머니는 반드시 삐콤씨를 먹었다. 저녁 일곱시에 시어머니는 근처 운동장에 가서 천천히 3킬로미터를 걸었다. 간이 짠 것, 맛이 매운 것, 너무 단 것을 올리면, 시어머니는 누굴 죽일 셈이냐며 밥상을 다시 차리라고 했다. 조미료 적게 쓰고 재료 자체만으로 맛나게 차려야 했으므로, 아줌마 G는 수산 시장과 청과물 시장을 종횡무진했다. 

시어머니는 밥 달라 할 때 다만 한마디를 말했다. "밥." 밥 소리가 떨어지고 나서 오분 안에 밥이 안차려지면, 웬갖 험하고 빈정상하게 하는 말이 쏟아졌다. 선생 며느리 들어오더니 밥도 못 얻어먹고 살겠네. 이 집에서 나 굶어 죽으면 제삿상은 좀 차려주소. 밥 소리가 떨어진 후 오분 안에 밥을 차려야 했으므로, 어떨 때는 주걱을 찾을 시간도 없었다. 바쁠 때는 아줌마 G는 주걱이 아니라 손으로 밥을 펐다. 밥이 뜨거워 손이 데이는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매일매일 끼니를 넘기는 게 중요했다. 주걱으로 푸나 손으로 푸나 먹는 사람들은 몰랐다.



식탐에 젖어있던 시아버지는 비교적 일찍 죽었다. 여든일곱의 나이로 시아버지가 죽고 나자, 아저씨 G는 매양 처량한 소리를 토했다. 난 이제 고아다, 고아. 우리 어매 이제 살면 얼마나 사실 끼고. 아줌마 G가 예순 줄에 들면서, 가끔 가끔 친구들과 모임이 있어서 밥상을 못 차리면, 아저씨 G는 아줌마를 달달 볶았다. 니 인생 그르게 살지 마라. 그래도 우리가 더 살지 어매가 더 살까? 니가 앞으로 어매 밥상을 차리면 몇 번이나 차리겄나? 다른 여자들도 다 그러고 산다. 우리 먹는 상에 숟가락 하나 더 놓는 것 갖고 되게 생색내네. 

유월의 어느 더운 날이었다. 시어머니가 곧 아흔살을 채운다고 호텔을 알아본다, 케이터링을 시킨다, 하고 아저씨 G는 호들갑을 떨었다. 아줌마 G의 시어머니는 오뉴월에 족욕을 하다가 뇌졸증으로 쓰러졌다. 쓰러진 후에도 시어머니는 쉽게 죽지 않았다.
현대 의학의 승리였다. 아줌마 G의 푼돈까지 낱낱이 알겨 먹고, 병상에서 십년 채우고 비로소 시어머니는 죽었다. 춘추 백세였다. 



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두시까지 손님들을 접대하고, 발인하고, 49제를 지냈다. 누구나 호상이라고 칭송했다. 오가는 조문객의 얼굴이 밝았다. 아저씨 G는, 나이 일흔아홉에 고아가 되었다며 울었다.  아줌마 G는 친구들과 긴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보성 녹차밭을 보고 싶었다. 동해 일출도 보고 싶었다. 푸른 바다에 붉은 해가 떠오르는 걸 보며 친구들과 소주를 한 잔 하고 싶었다. 오야에게 돈을 입금하고 내일이면 소풍 간다하고 짐을 싸 놓고 잠자리에 들었다. 아줌마 G의 가슴은 두근두근 뛰었다. 

그날 저녁 아줌마 G는 죽었다. 심장마비였다. 



일흔 둘이었다. 시어머니를 너무나 공경한 효부였기에 따라 죽은 거라고, 문상을 온 사람들은 말에 설탕 칠을 했다. 친구들은 뒷통수에 대고 언짢아했다. 그 집은 어째 두 달만에 조위금을 또 달라 하느냐고.

아줌마 G의 친구 한 명만이 "뼈골까지 빨려 죽었어"라고 나즈막하게 조아렸다. 



문제는 아저씨 G였다.
이제 어디서 어떻게 밥을 먹어야 할지, 아저씨 G는 도대체 답이 안  나왔다.
아저씨 G는 시내 곳곳의 밥집을 전전하기 시작했다. 밥집 아줌마들은 한결같이 아저씨 G를 싫어했다. 오천원 짜리 밥 팔아주면서 이것저것 까탈이 많다는 이유였다. 조미료가 너무 많다, 육개장은 이렇게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재료가 싸구려다, 라는 것이었다. 어디서 먹어도 입에 맞는 것이 없었다. 아저씨 G는 새들 새들 말라가기 시작했다.아저씨 G의 친구들은, 저 집에 곧 초상 한 번 더 나지, 하면서 쯧쯧 거린다. 

음식 투정 하지 말자. 나이 들수록 정말 추하지 않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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