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너무 쉽게 나오는구나. 갱년기가 지나서 그런지..
글을 올리기를 몇번 망설였다. 정치적이라고 정치 지형이 다른 동창들 맘을 상할까봐.
그래도 망자다. 이승에 갔음 정치는 없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고 올린다.
근태형 영전에... 담양댁
29일, 그 날 새벽꿈은 요상했습니다. 검은 정장에 눈부시게 하얀 와이셔츠를 받쳐입은 형이 활짝 웃으며 서너 명의 남자들과 어디론가 가시고 계셨는데 꿈속에서도 '아, 형이 건강해지셔서 퇴원하셨구나' 너무 반가워 형 쪽으로 뛰어가려는 것까지 생각나는 꿈이었습니다.
꿈이 하도 생생해 뒤숭숭하기 짝이 없었는데 몇 시간 후 형이 위독하다는 전화를 받게 된 것입니다. 그 길로 뛰쳐 올라가 형이 계신 중환자실을 들어갔을 때 그것이 이별인 줄 알았습니다. 눈은 흰 천으로 가려져 있었고 코에는 산소호흡기, 목도 긴 호스가 끼어져 있었습니다.
입을 벌리고 거친 숨을 몰아 쉬는 형의 모습은 형이라 해서 형인 줄 알았지 그냥 보면 전혀 알아볼 수 없는 참혹한 모습이었습니다. 씨름선수 다리처럼 퉁퉁 부은 다리를 문지르며 처음으로 맹렬한 살의를 느꼈습니다. 형을 이렇게 만든 그 인간, 이근안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근태형이 당한 고통 만큼 그 인간에게 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떨다가 문득 심장이 멎기 전까지 마지막까지 남아있는 것이 '청각'이라던 말이 떠오르더군요. 마지막 이별, 40여 년 인연의 끈을 가르는 이별 앞에 마음은 급해졌고 형의 다리를 주므르며 소리내어 인사를 했습니다.
"형 저 왔어요. 들리시죠? 형과 한 시대를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습니다. 형 사랑합니다..."
밤샘 사투도 허망하게 우리 곁을 영원히 떠나신 근태형. 의장님, 의원님, 장관님, 대표님...형 앞에 붙는 수식어는 다양했지만 민청년 활동가들의 아내인 우리들에게 김근태는 오로지 "형, 근태형"이었지요. 40여 년의 인연, 형과의 추억이 어디 한두 가지겠습니까만 후배의 아내들인 우리들에게 언제나 친구처럼 오빠처럼 격의 없이 대해 이렇게 버릇 없는 호칭이 굳어졌나 봅니다.
형을 만난 게 70년대 중반이었지요? 친구 인재근의 남편으로, 노동운동을 했던 내겐 소중한 조력자가 될 수 있는 인천도시산업선교회 실무자로, 형과는 친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었습니다. 그래도 40여 년이 넘는 세월을 함께 갈 줄은 몰랐었는데 전생에 우리는 아마도 형제였던 것 같습니다. 남편이 형이 창립한 민청년 활동가로 발을 들여놓았고 형이 고문 받고 감옥에 갇힌 그 기간 얼마 동안 형의 자리를 이어받아 민청년을 이끌어 갔으니 말입니다.
형이 영정사진 속에서 활짝 웃고 계셨습니다. 꿈속의 그 웃음. 만날 때마다 내 이름을 불러주시며 "대단해~~잘 했어," 뭐 사소한 것이라도 찾아내 대단한 사람인양 추켜세워주시던 그 모습 그대로. 형 덕분에 나는 대단한 사람이 되었고 내 이름을 불러 줄 때마다 내 자존감은 충만해졌습니다.
그런 형이이었는데 왜 저기에 사진 한 장으로 남아계신 것인가요. 결혼식을 열흘 앞두고 쓰러지신 아빠를 향해 "아빠 나한테 왜 이래, 왜 그러는 거야?" 쓰러진 아빠를 부등켜 안고 울부짖었다는 병민이가. 식 끝나자마자 신혼여행도 취소하고 바로 아빠 병실로 뛰어가 지극정성으로 아빠를 간호했던 병민이가 나를 보자마자 또 오열했습니다.
"이모,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우리 아빠 사진이 왜 저기에 있는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어요."
'딸 바보'였던 형. 딸을 보내기가 아까워 뭐가 그리 급하냐고 말리고 말려 기어이 서른 채워 간신히 딸의 결혼을 허락했던 형. 형은 아내 인재근의 전부였고 아들 병준이 딸 병민이의 태양이었습니다. 어디 그뿐이겠습니까. 형의 육신을 제물로 받쳐도 모자랐던 민주화투쟁. 80년대부터 90년 중반까지의 형의 존재는 우리에게 갈 길을 알려주는 나침반이었고 든든한 버팀목이었습니다. 세상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두려워도 형이 계신 한 이겨낼 수 있는.
돌이켜 보면 그 시절. 군부독재 타도를 위해 몸과 마음을 아낌없이 받쳤던 그 시절, 어린 자식들 팽개치고 교도소로 재판정으로 길거리로 백골단들과 싸움질 하는 것이 주업이었던 살벌한 시절도 우리에게는 그리움이 되는 것은 형을 중심으로 똘똘 뭉친 그 마음. 그 마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재야에서 재조로. 형을 위시한 우리의 동지들이 정치권으로 진입한 시절부터 형의 존재는 상처를 받기 시작했습니다. 정치인으로 화려하게 변신한 그룹과 그렇지 못한 그룹 사이에 보이지 않는 균열이 생긴 것도 그때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정치개혁을 통해 더 좋은 세상을 만들고 싶다는 형의 꿈이 일장춘몽처럼 덧없어지면서 우리들의 든든한 맏형 자리도 흔들렸고 형에 대한 기대가 큰 만큼 실망도 컸습니다. 원칙도 없고 신뢰도 없는 정치판. 약육강식의 뺏어먹기 정치판은 애초에 형같은 사람이 있을 자리는 아니었는지 모릅니다.
민주세력의 대부, 민주화운동의 상징 김근태. 얼마나 무거웠을까요? 말 한 자리, 행동 하나 수많은 국민들의 눈은 물론 옛 동지들의 자존심까지 떠안아야 되는 숙제는 겉은 멀쩡해 보여도 속은 이미 만신창이가 된 형이 감당할 수 있는 무게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고문후유증으로 파킨슨 병이 찾아 온 줄도 모르고 느린 행동, 어눌한 말투, 웃음기 없는 표정만 탓하고 짜증을 냈습니다. 맨날 심각하고, 맨날 고뇌하는 모습만 보여주는 반 박자 느린 후보를 누가 대통령감으로 찍겠느냐고 닥달을 했습니다.
남편이나 내 형제와 안에서는 아무리 치고박고 싸워도 남들이 내 식구를 향해 욕하는 것은 못 참겠는 것이 여자의 마음입니다. TV에 비친 근태형을 보고 우리끼리 따따부따 하다가도 언론이나 다른 사람들의 비판이나 조롱을 들으면 내가 모욕을 당한 것처럼 참담하고 억울했던 심정. 근태형을 따르던 민청년 여자들의 심정은 똑같았습니다.
근육이 굳어가 마음대로 웃을 수도 없었던 형에게 웃지 않는다고 짜증을 내서 정말 미안합니다. 오른 손이 너무 떨려 왼손으로 떨리는 오른 팔을 잡고 힘겹게 회를 집어 올리셨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너무나 비통해 통곡이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습니다.
거동이 가능한 형을 마지막으로 뵈었던 11월 11일.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계단을 올라가는 형을 발견하고 "형~" 소리치며 뛰어갔지요. 달려오는 나를 보고도 형은 웃지를 못했습니다. 반갑게 껴안는 내게 형이 했던 한마디.
"그.대.로.야..."
쪼글쪼글 늙은 할망이 다 된 내게 예전 그대로하고 하셨습니다. 그 짧은 말도 천천히 끊어가며 하시는 형의 건강상태는 의료 쪽 문외한이라도 보통 심각한 것이 아니란 것을 느끼기에 충분했지요. 형의 마지막 육성이 지금도 귓가에 쟁쟁합니다. 그대로라는 당신의 한 마디는 잔주름과 검버섯이 뒤덮힌 후배의 늙음을 인정하기 싫은 다른 표현이었겠지요. 근태형 식의 사랑표현은 늘 이런 식이었으니까요.
보건복지부 장관 시절, 옛날 민청년 극성쟁이 아낙들을 장관실로 초청해 주셨을 때가 생각납니다. 과천종합청사 장관실을 처음으로 방문한 민청년 극성쟁이 아낙들은 예전 버릇 못 버리고 완전히 와글와글 봉숭아학당이 따로 없었지요. 그 아낙들 속에서 형이 내 어깨를 잡더니 장관 책상 뒤 의자에 앉혔습니다.
"자, 우리 조아무개 장관을 모시고 우리 단체사진 찍자."
중병에 걸리고도 용케 살아난, 남편이 백수가 되건, 검버섯 총총한 촌 할망이 되건 여전히 기죽지 않고 씩씩하게 싸돌아다니긴 했지만 형은 내심 마음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1분 장관이 되어 사진 한 방을 박으면서 이심전심 굳이 설명 안 해도 헤아려졌던 마음. 마음은 있어도 해 줄 여건이 안 되는 형의 안타까움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형과의 영원한 이별이 이제 12시간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형이 가실 모란공원. 오솔길 입구에는 계훈제선생님이 마중나와 계실 것이고 형의 유택 아래에는 꿈에도 그리운 후배 이범영이 버티고 있을 것입니다. 어디 그뿐일까요. 앞뒤 좌우 문익환목사님, 김병곤동지, 죽마고우 조영래변호사, 존경하는 선배 김진균교수 전태일을 위시한 노동자 동지들, 청년 학생, 전교조 김현준선생까지...
아, 맞은 편엔 형이 그렇게 가슴 아파했던 박혜숙, 민청년 극성쟁이 아낙 중에서도 속이 없을 정도로 착해빠졌던 혜숙이도 묻혀 있지요. 좋으시겠습니다. 그리운 동지들과 만나 거한 환영파티라도 하실랍니까? 남은 자들은 이런 것조차 위로를 삼고 싶어 합니다.
긴 오일장. 연말연시가 겹쳐 행여 쓸쓸하면 어쩔까 걱정했는데 아침부터 자정까지 나흘 내내 문상객이 줄을 잇습니다. 여야를 막론한 정치인들, 노동자, 농민, 청년, 학생, 일반 시민들...아이들과 함께 온 젊은 부부들. 모두가 한 마음으로 형의 빈 자리를 가슴 아파하고 아까워하더군요.
가시고 나서 깨닫게 된 한 가지. 형은 큰 산이었습니다. 김근태의 단점, 그럼에도 불구하고 형의 족적은 우리가 따라야 할 눈밭의 발자욱이란 걸 확인합니다. 형, 우리 가슴 속에 그리움으로 남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형의 부재를 애도하는 수많은 시민들. 그들이 바로 형이 남기신 유산입니다.
새벽에 보았다. 아무리 갱년기가 지났어도 눈물은 안 흘리는 난데, 눈물이 흐르더구나.
예전엔 별로 였었다. 한국에 있을 때... 민주화투사인데, 정치는 취미인 것처럼 항상 한박자 느렸었다. 보건복지부장관때도 유명했었다. 느리다고. 근데 그때도 고문후유증을 앓았더구나.
여자후배들이 형이라 부르는 학번이었던 기억도 새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