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에 쓴 글

오팔년 개띠

한주환 2018. 1. 25. 21:29

늘 궁금했었다. 왜 58년 개띠가 사회에서 주목받는가..


첫째 출생자수다.

625이후 가장 많은 신생아가 태어난 년도가 58년이다. 백만명이 넘었단다.


60년 인구센서스에서는 55∼57년생이 70만 명대, 59∼60년생이 80만 명대인 데 비해 58년생은 100만 명을 넘어서 그 숫자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통설이 확인되는 듯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같은 개띠해인 70년 인구센서스를 찾아봤다. 58년생이 87만여 명으로 줄어들고 60년생이 100만여 명으로 역전돼 있었다. 2000년 인구센서스를 찾아봤다. 58년생은 81만여 명으로 70만 명대인 55∼57년생보다 많지만 59년생과 60년생에 비해서는 적다. 이러한 경향은 1960년을 제외한 인구센서스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70년까지 십수만명이 넘는 58년생들이 죽었다는 통계는 말도 안되지만,

우린  단군이래 동갑내가 80만명을 넘는 최초 세대다. 그때 기억난다. 


오후반이라고.. 이웃 국민학교 애들 아침에 학교 안가고 놀던.. 난 교대부속국민학교를 시험보고 들어가서 1학년이 3반인 오후반 없는 학교를 다녔다.

근데 6개월과정으로 고졸자를 국민학교 선생으로 발령내는 양성소가 교대에 있어 매월 교생이 있었다. 좋았던 시절이다. 고졸로 6개월 교육받으면 선생이 되었으니..



둘째, 뺑뺑이로 중고등학교를 진학했다.


우리들이 중학교를 올라가려 하자 서울, 직할시, 전국 순서로 입학시험이 없어졌다. 우리는 은행알 나오는 저걸 돌렸다. 난 6번이 나왔는데 친한 친구들은 다 1번이 나왔다. 그래서 헤어지는구나 했는데 1,6번이 같은 중학교였다. 



동갑네인 이 분 덕이다.

기초군사훈련 시절 3소대만 부모님 편지 쓰시는 시간인데 나머지 전중대원이 얼차려를 몇시간 받았다. 물론 덕도 보았다. 육사 영어시험이 서울대식이라 그렇게 준비했는데, 77년 영어회화 100%로 바뀌었다. Tom and Judy라는 교과서를 외웠던 난, 틀릴 게 없더라.

들어가고 나니 독해는 못해도 회화는 잘하는 이분 덕이라고..


그래서 우리는 뺑뺑이, 고상한 말로 평준화 세대가 된 것이다.  경기고 나온 대학동창은 고교 동문회에서 안 받아준다고 투덜대고..



사족이다.  이분 얼굴같은 분들  캐나다에 많다. 홈리스나 차이나타운에서. 중독된 얼굴이다.

국민개병제도 지키고 60만 현역 상한을 지키기 위해 방위, 전경, 경비교도대, 소방 뭐뭐 별의별 군대가 다 있었다. 쪽수가 많다보니 한국정부의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77년 4년제 대학 입학정원이 7만명이었단다. 동갑네중 7%만 대학에 갔다. 경쟁이 심했다. 

근데도  졸업정원제를 82년에 도입했다. 이유가 있었다. 장남은 59년생으로 집권전에 이미 외대 영어과에 입학했었고, 이분이다. 겨우 외대가는데 든 과외비가 너무 비싸 80년 과외금지가 내렸었다.



생년월일이 62년생, 딱 82학번이다. 요건 미국 범칙금 고지서다.

차량은 메르체데스 E320이었단다.



세째 회사 취직하니 동기가 제일 많았다. 


취직하니 윗동기 10명인데 우리만 33명 뽑았더라. 아래동기는 8명인가 뽑고,,

대충 다 그랬다. 총선 있다고 기자들도 많이 뽑고 했었다. 주목받을 수 밖에 없지 않는가.

신입사원이 수십명씩 들어왔으니..


넷째, 신도시 개발도 우리와 관계있단다.


결혼해서 주택 시장에 들어간 1980년대 중반에는 주택난이 본격적인 사회문제로 대두됐다. 결혼을 하고 자식을 낳고 30대에 들어선 58년 개띠를 맞아 주택정책은 필연적으로 변화를 맞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90년 당시 서울의 주택보급률은 57.9%. 58년 개띠를 거두기에 서울은 너무 비좁았다. 정부는 분당ㆍ일산ㆍ산본 등 신도시 개발을 통해 주택 200만채 건설에 나섰다. 아파트 값은 신도시 아파트 분양과 함께 간신히 폭등세를 멈췄다.



당시 이문동에서 전세살던 나는 분당에 갈 돈이 없었다. 근데 오후에 사무실이 텅 비더라. 모두 분당 오픈하우스에 구경갔다 오느라고. 



한국의 베이비붐을 상징하는 세대인 '58년 개띠'는 공교롭게도 자산시장의 역사를 만들어나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부의 지도를 새롭게 만드는 핵심 역할을 해왔다.

이들이 나이를 먹어갈 때마다 한국의 소비시장과 자산시장은 요동쳤고 정부도 정책의 골격을 만드는 데 이들의 라이프사이클을 가늠자로 삼았다. 


58년 개띠는 그 이전 세대에게는 활달하고 잘 뭉쳐 다니는 평준화 세대로서 인상이 강하다란 말ㅇ은 아니다. 쪽수가 많다보니 타의로 그렇게 비친 것이다.


다섯째, 사오정세대가 되었다. 물론 다수인 우리가 주요 타켓이었다.


그 이후 세대에게 ‘58년 개띠’는 산전수전 다 겪은 ‘나이 든 세대’의 대명사다.

박정희 전 대통령의 아들인 지만 씨가 58년생이라는 점이 상징하듯 이들은 생물학적 나이로나 상징적인 의미에서 ‘아버지’인 박 전 대통령의 통치기를 거치며 10월 유신, 10·26, 12·12, 5·18을 겪었다. 좋건 싫건 그들은 박정희 세대다. 79년 군에간 난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군대였다. 국난극복기장도 받았던. 우리가 사회에 진출하자마자 그 후배들인 386세대에 의해 석기시대 운동권인 "역사" 로 인식되게 된 것도 그 때문이다. 물론 이론도 없이 페다고찌 정도였으니.


외환위기 이후 ‘58년 개띠’는 사오정 세대의 대표로 다시금 역사의 조명을 받고 있다. 

00년 회살 그만둔 나도 사오정 세대다. 동기 33명중 제대로 남아있는 친구가 10명 미만이다.


궁금한 게 풀리니 속이 시원하다. 나만 그렇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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