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시와 글

고기를 굽다 유계자

한주환 2020. 8. 14. 19:44

모처럼 동창들이

바닷가 펜션에 모여 삼겹살을 굽고 있다

 

 

주식으로 집 두어 채 말아 먹었다는

별명이 주꾸미인 친구가 집게를 들고

뭐든 한방에 해치워야 한다며 고기가 탈 때까지 기다리려 하자

 

 

중소기업 대표인 문어가

뒤집을수록 기회는 생기게 되고

사람은 손이 빨라야 한다고 훈수를 둔다

 

 

그들을 바라보던 말단 공무원 넙치가

뭐든 슬슬 익혀야지 급하면 속은 핏물이야 라며 집게를 낚아 챈다

숯불에서 삼겹살이 구워지는 동안

 

 

아파트 경비원 하다 잘린 새우가

단번에 구워지는 인생은 없다며

이제는 막노동도 힘들다고 연신 술잔을 들이켜다

다들 빈 잔마다 채워 봐

 

 

저 바닷물이 출렁이는 건 내 눈물이 넘쳐서 그래 그러니 건배!

석쇠 위에는

고기가 구워지는 건지 우리의 삶이 구워지는 건지 모르게 구워지고 있었다

 

시집 오래오래오래 (지혜, 2019)

 

모처럼 시 다운 시를 보았다. 근데 막노동하는 난 힘들지 않고, 연신 술잔을 들이키지도 않는다.

그리고 새우는 싫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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