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의 내 꿈은 운전사였습니다
분명 한때 내 꿈은 우리나라 최고의 트럭 운전사가 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 쯤은 낡고 툴툴거리는 트럭에다가
산판 현장에서 막 베어내 아람드리 생목과
별 쓸모없는 잡목 토막까지도
한 차 가득 싣고 전국 탄광의 갱목이나 성냥 공장 혹은 이쑤시개 제조장으로도
휘파람을 불려 유쾌하게 자동차 엑셀레이터를 밟으며
곳곳에다 필요한 목재를 공급해 주는 그런 운전사이고 싶었습니다
자갈밭이나 진흙탕이 나타나면 더욱 부드럽게 운전하고
노을이 유난히 아름다운 저녁 무렵에는
플라타너스가 파도처럼 물결치는 한적한 시골 길에 차를 세우고
담배를 빼어 무는 여유도 보이면서
생을 관조하고 삶의 의미를 되새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소도시 공업학교의 교사가 되었습니다.
해마다 지원자 수가 줄어드는 실업교육의 일선에서
내 앞에 놓인 아이들은
소위 돈도 없고 빽도 없고 성적도 없는
대학 진학 못하는 죄로 인문계 학생들에게는 언제나
열등감으로 주눅이 들어 있는 아이들
툭하면 의자로 찍고 칼로 찌르고 파출소에 불려가고
때로는 대담하게 교사용 변소에서
담배 피우다가 교무실로 불려와 얻어터지고
이웃 여학교 학생들과 미팅할 때도
공고 학생이라고 제 풀에 눌려
미팅 비용 다 대기로 소문난 측은한 아이들
열 번 잘하다가 한번만 못해도
할 수 없는 놈들이라고 선생님들에게마저도 낙인 찍히는 아이들
이런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이 되었지만
나는 여전히 운전사이고 싶습니다
이 잡목과도 같이 버려지고 있는 아이들을 한 트럭 가득 싣고
우리 모두가 인간으로 대접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인간으로 당당하게 설 수 있는 곳으로 운반해 주는
지금도 그런 운전사이고 싶습니다
왜 이 시가 눈에 들어오나 했더니,
이민 와서 처음 시도했던 직업이 트럭운전사였고,
그 다음 직업이 목수이니 딱 실업고 출신 직업이어서다.
근데 트럭 운전을 해도 년봉 10만불 넘고, 목수를 해도 6만불이 되어서
집 사고, 보트 사는 캐나다는 대체 무슨 나라냐!
한국 아직도 실업고를 이렇게 무시해도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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