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한 분이 진료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하얀 피부에 로만 칼라의 검은색 수단이 잘 어울렸다.
한눈에 보기에도 서품을 받은 지 얼마 안 된 젊은 신부님이었지만
표정과 눈빛은 마치 일생을 수도원에서 생활한 수사님의 그것처럼 고요하고 맑았다.
나도 모르게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서며 “신부님, 어디가 편찮아서 오셨습니까?”
하고 인사를 드렸더니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겠습니까?”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짧은 느낌만으로도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인상이 들었지만,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았다.
신부님의 얼굴에 잔잔한 미소가 떠올랐다.
“기억하실 리가 없지요. 벌써 15년 전이니….”
마음속으로 15년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나이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것으로 봐서 15년 전이라면 10대 후반이었을 텐데.’
그렇게 기억을 더듬는 순간 신부님의 맑고 깨끗한 얼굴이 한 고등학생의 얼굴과 겹쳐졌다.
“아, 혹시 그때 암으로?”
내가 기억의 고리를 붙잡는 순간 신부님의 얼굴이 환해지면서 “이제 기억하시겠어요?”
하고 내 손을 맞잡았다.
“그렇군요.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요. 그런데 어떻게…?”
나도 모르게 옛날의 까까머리 고등학생이 이렇게 신부님이 된 연유를 묻고 있었다.
그때 나는 레지던트 1년차였다.
매일같이 이어지는 수술과 병실 관리에 가뜩이나 지쳐 있었던 그 무렵, 한 암 환자의 임종이 있었다.
40대 후반의 여자 환자였다. 식사 후에 속이 불편하다고 해서 내시경을 받았는데,
‘가락지 모양 세포 타입’의 위암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위암의 여러 가지 형태의 세포형 중에서 가장 나쁜 형태였다.
환자의 세포형이나, 수술 전 CT 검사 결과는 전이를 충분히 의심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럴 경우 의학 용어로 O&C(Open & Close), 즉 드라마 <하얀 거탑>의 주인공처럼 개복을 했다가
수술을 포기하고 그냥 닫아야 할 가능성이 컸지만, 그렇다고 속수무책으로 기다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수술에 들어갔지만 결과는 역시 ‘절제 불가능’이었다.
위장의 뒷면이 이미 후 복막에 유착되어 있었고, 암 덩어리에서 떨어져 나온 악성 세포들이
웅덩이에 부유하는 풀꽃들처럼 복강 전체에 퍼져 있었다.
외과 의사가 가장 바라지 않는 상황이었다. 마치 촛농이 뚝뚝 떨어진 것처럼 암 덩어리들이 뱃속에 전부 퍼져 있었던 것이다.
집도하던 과장님이 긴 한숨을 내쉬면서 그냥 닫을 것을 지시하고 가운을 벗고 수술대를 떠났다.
환자의 절개된 피부가 다시 봉합되고 환자는 중환자실을 거쳐 하루 만에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
환자는 자신이 하루 만에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는 사실만으로도 수술 경과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때부터 마지막 남은 여명까지는 시간이 많지 않았고, 환자 스스로도 자신의 삶을 정리하는 시간으로 받아들였다.
상태는 빠르게 악화되었다. 결국 환자는 수술 후 퇴원도 하지 못하고 두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이 환자의 임종은 거의 일상적으로 환자의 임종을 보아왔던 외과 의사들에게 잔잔한 감동과 긴 여운을 남겼다.
당시 병실에서는 늘 ‘성가’가 흘러나왔다. 대개 종교가 있는 환자들의 경우에 해당 성가를 듣는 것은 일상적인 일이다.
하지만 이분은 배에 복수가 차오르고, 나중에는 불러진 배가 횡격막을 눌러 숨을 쉴 수가 없을 지경인데도
성가의 선율을 나지막하게 따라 부르며 진통제도 없이 그 긴 고통의 시간을 이겨냈다.
환자는 모르핀 투여를 원하느냐는 의사의 질문에 늘 고개를 저었다.
모르핀이 고통을 줄여줄지언정 영혼을 취하게 하는 것이 싫다고 했다. 환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 고통을 이겨냈다.
그때 그 환자에게는 고등학생인 아들과 중학생 딸이 있었다.
남편과 일찍 사별하고 혼자서 두 아이를 키워왔는데, 자신마저 그 아이들을 남겨두고 먼저 세상을 떠나야 했던 것이다.
남매는 의젓하고 어른스러웠다.
아이들은 아기 팔처럼 가늘어진 엄마의 양 손을 꼭 잡고, 엄마가 원하는 대로 기도를 하거나,
성가를 부르거나, 혹은 엄마의 귀에 항상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마지막 임종의 순간, 큰 아이가 창백한 엄마의 얼굴에 뜨거운 눈물 방울을 뚝뚝 떨어뜨리며 말했다.
“엄마, 잘 가요. 엄마, 참 애썼어요. 우리도 이만큼 컸으니 이제 아빠 보살펴드리러 가세요.
그리고 조용히 왼팔로 목을 잡고 오른 팔로 어깨를 안고 귀에 속삭였다.
"엄마, 고마웠어요. 엄마, 사랑해요.”
엄마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눈물이 줄줄 흐르고 옷의 절반이 눈물로 젖어 있었다.
라는 말 한마디 한마디는 그 장면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가슴을 적셨다.
그리고 그 아름다운 이별의 순간을 내 마음속에 각인시켜 주었던 그 아이는 내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 갔다.
그런데 지금 그 아이가 신부님이 되어 내 앞에 있는 것이다.
“얼마 전에 책을 보고 선생님이 이곳에 계신 것을 알았어요. 오늘 마침 안동을 지나는 길에 한번 들러보았지요.”
"선생님은 기억하지 못하시겠지만, 그 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입장에서는 가혹하고 힘들겠지만,
그때 홀로 남겨진 그 착하고 곱던 남매 중에 오빠가 사람의 영혼을 지키는 사람이 되어 내 앞에 서 있었다.
몇 마디 반가운 인사가 오간 다음 갈 길이 멀다며 바로 돌아서는 신부님에게 “그럼 동생은 지금…?”이라는 질문은 하지 않았다. 아마도 필요 없는 말일 것이므로.
한참 동안 신부님이 나가신 문 쪽을 바라보다가, 어느 시인의 시 제목이 떠올랐다.
“마음의 사랑은 꽃보다 아름답다.” 내 희미한 기억 속에 새겨진 어느 환자 가족의 이야기가 바로 그러했다.
P.S. 동생은 교대 졸업하고 선생님이 되었다.
이 글을 올리는데 고민을 했다. 안철수와 절친인, 박경철씨 글이다. 민주당에 위장취업? 을 시켰다고
의심 받는 인물이라.. 근데 글이 좋아서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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