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좋아하는 시와 글

비굴 레시피 안현미

한주환 2018. 3. 5. 19:19

<시인 사진>



<시작>


재료 

비굴 24개/ 대파 1대/ 마늘 4알 
눈물 1큰술/ 미증유의 시간 24h 


만드는 법 

1. 비굴을 흐르는 물에 얼른 씻어 낸다. 
2. 찌그러진 냄비에 대파, 마늘 눈물 미증유의 시간을 붓고 팔팔 끓인다 
3. 비굴이 끓어서 국물에 비굴 맛이 우러나고 비굴이 탱글탱글하게 익으면 먹는다 



그러니까 오늘은 
비굴을 잔굴, 석화, 홍굴, 보살굴, 석사처럼 
영양이 듬뿍 들어있는 굴의 한 종류로 읽고 싶다 



생각컨대 한 순간도 비굴하지 않았던 적이 없었으므로 
비굴은 나를 시 쓰게 하고 
사랑하게 하고 체하게 하고 
이별하게 하고 반성하게 하고 



당신을 향한 뼈 없는 마음을 간직하게 하고 
그 마음이 뼈 없는 몸이 되어 비굴이 된 것이니 
그러니까 내일 당도할 오늘도 
나는 비굴하고 비굴하다 


팔팔 끓인 뼈 없는 마음과 몸을 
당신이 맛있게 먹어준다면 

<끝>


<시인이 살아 온 인생>


안현미는 남인수의 노래를 남인수보다 더 잘 부르는 남자, 장동건이 일찍 태어났더라면 그이 때문에 빛이 바랬을 남자가 시인의 아버지였다고 했다. 그 아버지가 조강지처를 따로 두고, 서른도 되기 전에 남편과 사별한 채 딸 둘을 키우던 태백 장성광업소 부근의 여인을 만나 그네를 낳았다. 아비는 탯줄을 직접 자신이 끊을 정도로, 갑자기 불어난 아우라지 강물에 떠내려가던 젖먹이를 구하기 위해 몸을 사리지 않을 정도로, 그 딸을 예뻐했다. 그네는 여섯 살 무렵 아버지의 조강지처에게 보내졌고.


스물 한 살 때, 그네는 생의 크레바스에 도달했다. 이대로 살아야 하는 건지, 삭발하고 산문에 들어야 하는지 막막하고 슬펐다. 한 번도 자신을 먼저 찾지 않았던 생엄마를 찾아가는 건 자존심이 상했지만 중요한 문제였다. 아무에게도 묻지 않고, 어린 시절 기억에 남은 ‘뚱순이 엄마’를 찾아 태백으로 갔고, 장성 광업소 함바집에서 만난 그 엄마는 대수롭지 않게 “인중에 점이 있는 걸 보니 맞네” 하면서 밥을 고봉으로 퍼주었다.

 

키워준 엄마가 죽고, 시인이 된 후 태백으로 내려가는 길에 엄마가 장성 광업소 인근 ‘자장면집’에서 일하고 있다고 시인이 발설했다. 먼저 청하긴 쉽지 않았지만 결국 그곳으로 갔고, 시인의 엄마가 일하는 자장면집 ‘장성각’에 들어가 시인과 생모의 3년 만의 만남을 지켜보았고, 그날 밤 그네들의 묵은 사연을 들었다. 장성각에서 나와 인근 식당에서 시인이 태백에 올 때마다 먹고 싶었다는 도루묵 찌개를 시켜 놓고 술을 마시던 자리였는데, 어머니 엄정자(69) 여사가 드르륵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술잔이 오고 가는 사이에 슬며시 물었다. 딸을 보내고 어찌 한 번도 연락을 안 했으며, 스스로 찾아와도 그리 쿨하게 대한 연유가 무엇인지. 그네는 긴 말 없이 “딸의 안부를 바위에게 물었다”고 답했다. 태백은 강원도 깊은 산중이어서 영험한 바위도 많은 모양인데, 그네는 늘 그 바위를 치면서 딸의 안부를 물었다고 했다. 어느 바위냐고 물었더니, 가슴 속에 박혀 있던 바위였다고 엄마는 답했다. 기분이 좋으면 그 바위는 딸의 안부를 긍정적으로 전해주었고, 우울하면 아무리 그 바위를 탕탕 쳐도 슬픈 소식만 돌아왔다고 그네는 말했다. 시인의 유전자를 내려준 생모가 분명하다.


안현미 시인은 두 번째 시집 자서에서


부러 그리한 것은 아니었으나

내 존재로 인해 고통 받았던 여인들

무덤 속에 있는 엄마와 태백에 있는 엄마

내 삶과 죽음의 공양주 보살들에게

‘감히’ 이 시집을 바친다

고 썼는데,


이 구절을 듣고 태백의 어머니는 그날 미안하다고 딸에게 말했다.

자장면집 ‘장성각’에서 일하는 그네는

“마늘을 깔 때 까고 또 까면 맨 마지막에는 얄부리하고 예쁜 속살이 나온다”면서

“처음 깔 때는 아프지만 맨 마지막에는 너무 예쁜 것처럼 우리 현미 시가 이거와 똑같다”

고 양파를 깔 때처럼 젖은 눈으로 덧붙였다. 



그냥 서울여상 나온 불세출 시인인 줄 알았는데 이런 부모들 밑에서 자라난 줄 몰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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