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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줌마가 된 소녀를 위하여 김기택

한주환 2020. 3. 16. 06:00



마흔이 넘은 중년의 여자는
아직도 나를 오빠라고 불렀다



오빠, 옛날하고 똑 같다!
오빠, 신문에서 봤어.
시집도 읽었어. 두 권이나!



얼굴은 낯설었으나 웃음은 낯익었다.

그녀가 웃을 때마다 옛날에 보았던 소녀가
중년의 얼굴에서 뛰어나왔다.


작고 어린 네가
다리 사이에 털도 나고 브래지어도 차는
크고 슬픈 몸이 되었구나



네 가녀린 몸을 찢고
엄마보다 큰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들이 나왔구나



오랜 세월은 남편이 되고 아이들이 되어
네 몸에 단단히 들러붙어
마음껏 진을 빼고 할퀴고 헝클어 뜨려 놓았구나.


30년 전의 얼굴을 채 익히기도 전에
엄마와 아내를 찾는 식구들이 쳐들어 오자
소녀는 얼른 웃음을 거두고
중년의 얼굴로 돌아갔다



오빠, 갈게.
손 흔들며 맑게 웃을 때 잠깐 보이던 소녀는
돌아서자마자 수다를 떨며
더 큰 아이들에게 잔소리를 퍼부으며
다시 흔한 아줌마가 되어 있었다


「문학과 사회」2000년 겨울호 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