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환상통 김신용

한주환 2018. 4. 8. 11:56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 

나무도 환상통을 앓는 것일까? 

몸의 수족들 중 어느 한 부분이 떨어져 나간 듯한, 그 상처에서 
끊임없이 통증이 배어나오는 그 환상통, 
살을 꼬집으면 멍이 들 듯 아픈데도, 갑자기 없어져버린 듯한 날 


한때, 
지게는 내 등에 접골된 
뼈였다 
목질(木質)의 단단한 이질감으로, 내 몸의 일부가 된 
등뼈. 


언젠가 
그 지게를 부수어버렸을 때, 다시는 지지 않겠다고 돌로 내려치고 뒤돌아섰을 때 
내 등은, 
텅 빈 공터처럼 변해 있었다 
그 공터에서는 쉬임없이 바람이 불어왔다 


그런 상실감일까? 새가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떨리는 것은? 

허리 굽은 할머니가 재활용 폐품을 담은 리어카를 끌고 
골목길 끝으로 사라진다 
발자국은 없고, 바퀴자국만 선명한 골목길이 흔들린다 


사는 일이, 저렇게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라면 얼마나 가벼울까?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는 창밖. 

몸에 붙어있는 것은 분명 팔과 다리이고, 또 그것은 분명 몸에 붙어 있는데 
사라져버린 그 상처에서, 끝없이 통증이 스며나오는 것 같은 바람이 지나가고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흔들리고 있다.



시인 김신용은 중졸 학력에 전과가 5범으로 14세의 나이에 부랑을 시작했다. 지하도나 대합실에서 노숙하며 매혈로 끼니를 해결했다. 더 팔 피가 없으면 걸식, 꼬지꾼, 하꼬 치기, 저녁 털이, 뒷밀이, 아리랑 치기, 급기야 펠라티오 아리랑 치기까지 살아남기 위해서 라면 어떠한 일도 했다. 그러는 동안 소년원을 시작으로 해서, 감방을 숙식을 해결할 수 있는 곳 쯤으로 여기며 드나들었으며 재생원, 갱생원 등을 두루 섭렵하는 동안 별을 5개 달았다. 그러다

 우리 문단에는 시인으로 등단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제도가 있다. 흔히 신춘 문예도 있고 시인 지망생의 투고를 받아 뽑는 각각의 문예지 현상 공모도 있고, 신인 추천 제도도 있다. 그러나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우연히 눈에 띄어 시인이 되는 사람도 있다. 꼭 농담처럼 말이다.

내가 그랬다. 나는 생전 처음 찾아든 서울 인사동의 한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시인이 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아마 사람들은 웃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시인이 되었다. 신춘문예나 그 흔한 문예지에 투고도 하지 않고 말이다.

그때, 인사동에는 ‘실비집’이라는 이름의 한 술집이 있었다. 나는 그 술집을 한 화가 때문에 알았다. 그때 88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새로 만들어지는 대학로에서 보도블럭을 까는 일을 하다가 그 화가를 만났었다. 그는 서울대병원 뒷담벼락에 빨래집게로 그림을 걸어 놓고 노상 전시회를 하고 있던 가난한 화가였다.

그가 어느 날, 값싸고 술맛 좋은 술집이 있다며 나를 데려간 곳이, 지금의 사동면옥이 있는 좁다란 골목의 막다른 길의 끝에 있는 ‘실비집’이었다. 그 실비집은 인사동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조선 기와집의 내부를 술청으로 개조한 술집이었는데, 값싼 실비집이라는 이름답게 가난한 시인 지망생이나 화가 소설가 할 것 없이 갖가지 예술의 꿈을 품은 사람들이 찾아들었다.

그들은 소주나 막걸리에 김치 깍두기를 앞에 놓고 가난하고 절박한 영혼을 달래는 모습들이었다. 때로는 철학적인 고담준론에 현실적인 시국 토론으로 분위기를 끌어올리곤 했다. 나는 난생 처음 마주치는 그 분위기가 좋아, 비가 오거나 일을 쉬는 날이면 찾아들어 구석진 자리에 앉아 혼자 술을 마시고는 했었다.

그리고 그때, 내 군용 야전 점퍼의 윗 호주머니에는 누런 갱지에 볼펜으로 눌러 쓴 습작시가 들어 있었는데, 나는 그것을 꺼내보며 혼자 술을 마시고는 했었다.



그런 어느 날이었다. 그날도 나는 구석진 자리에 앉아 습작시를 보며 술을 마시고 있었는데, 그때 건너편에 앉아 있던 한 사람이 다가와 지금 읽고 있는 시를 좀 보여줄 수 없느냐고 했다. 나는 기꺼이 시를 건네주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 사람이 다시 다가와 자신은 그 당시 전봉건 선생이 주간으로 있는 <현대시학>에 초회 추천을 받은 시인 지망생이라고 자기소개를 하며, 자신도 인사동을 뜨내기로 드나들며 다른 무명시인들의 시를 많이 보았지만 이 시가 너무 좋다며, 이 시를 자신에게 좀 빌려줄 수 없느냐고 했다. 나는 기꺼이 그러라고 했다.

그런데 며칠 후, 전화가 왔다. 그때의 나는 서울역 앞의 양동 무허가 하숙방에 기거하고 있었는데, 전화는 주인집 방에 있는 것이었다. 아마 그때 나는 전화가 없어 주인집 방의 전화번호를 가르쳐준 모양이었다. 어쨌든 그날, 7호실 전화 받아요, 하는 소리에 슬리퍼를 끌며 주인집 방으로 가 전화를 받았는데, 뜻밖에도 전화기에는 실비집에서 시를 건네준 그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그리고 대뜸 내게 형이라는 호칭을 붙이며 낮 12시에 그동안 써놓은 시를 모두 가지고 인사동의 ‘귀천’으로 나오라는 것이었다. ‘귀천’은 그때, 천상병 시인의 부인 목순옥 여사께서 열고 있던 조그만 찻집의 이름이었다. 나는 이것도 훗날에 알았다.

어쨌든 그 날, 나는 약속대로 귀천으로 나갔었다. 대학 노트에 빼곡히 적어 놓은 습작시를 들고-.

그런데 약속 시간에 또 뜻밖에도 최승호 시인이 나타났다. 그리고 어리둥절해 있는 내게 지금 어디에 살며 하는 일은 무엇인지 이것저것을 물었고, 나는 양동에 살며 오랫동안 청계천의 지게꾼이었다는 것을 얘기하자 더 이상 묻지도 않고 내가 가지고 나갔던 대학 노트를 들고 돌아갔다.



그리고 얼마 후, 그때 고려원에서 새로 창간된 시 전문 무크지 <현대시사상>1집에 ‘양동시편-뼉다귀집’ 외 6편이 실려 있었다. 그리고 그 해 겨울, 대학 노트에 빼곡히 적혀있던 시들은 첫 시집 <버려진 사람들>로 출간되었다.

나는 그렇게 시인이 되었다. 그러니까 대학로에서 보도블럭을 깔다가 한 화가를 만나 우연히 찾아든 술집에서 술을 마시다가 나는 시인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꼭 농담처럼. 그래, 농담처럼.


인생, 알 수 없습니다. 열심히 삽시다!